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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좋아해/: 상담사례·칼럼·기타

손해사정과 기만행위

모든 일이 톱니바퀴 맞물리듯 딱, 딱. 맞아 떨어지는 줄 알던 때가 있었다. 하나만 틀어지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분개하는데 에너지를 탕진하는 나날이었다. 이제는 내일 받을 줄 알았던 다이어리가 재고가 없어서 못 보냈다는 안내 전화를 받아도 별로 분개하지 않는다. 그냥 주문을 다시 하면 되지.


이렇게 사람이 하는 일은 다소 주먹구구인 구석이 있다. 


보험회사의 보상도 그렇게 이루어진다. 보험금 청구권이 있는 고객(보험계약자)가 앱(app)이나 메일, 팩스로 보험금을 청구하면 본사 보상팀에 접수된다. 이 과정에서 가입자가 가지고 있는 담보와 한국표준질병분류코드 등을 확인하는 과정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애매하거나 모호한 부분이 있으면 추가적으로 확인한다. 추가 서류를 요청하거나, 사기조사전담팀(SIU)의 점검이 있다. 혹은 손해사정사에게 손해사정업무를 위임하기도 한다.


손해사정(claim adjustment)은 말 그대로 발생한 손해가 보험목적에 해당되는지 여부, 손해액을 평가하고 결정하고 보상금을 지급 하는데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보험금을 얼마를 줘야 하는지, 또 이것이 줘야 하는 게 맞는 지를 따져야 한다.


"보험사가 돈 안 주려고 별 지랄을 다 하는 거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주로 도덕적 이미지를 가지고 싶어하는 설계사들 이나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보편적인 사람들의 목소리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보험사가 손해사정을 하는 이유는 모든 선량한 가입자들의 보험료를 보호하고 또 새로운 가입자들이 부당하게 많은 보험료를 부담하지 않기 위해서 기도 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 일련의 행위는 보험사의 이익에도 도움이 된다. 실제로 이 과정에서 많은 보험사기(선의든 아니든)가 발각되기도 한다.


최근에 고객이 보험금 청구를 했다. 약간 애매한 부분이 있었고 고객과 손해사정사와의 미팅이 있었다. 내가 초기에 안내해준 부분과 다른 이야기가 오고 갔다. 여기에 다 쓰기엔 좀 그렇고. 일부만 요약하자면 손해사정사 측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 자기가 최근 고객 같은 케이스 3건을 다뤘는데 셋 다 지급 되지 않았다. ⓑ 원래는 안되는 게 맞다. ⓒ 하지만 이런 내용을 충족시킨다면 급여부분은 90%, 비급여부분은 40% 지급 받을 수 있도록 안내 드리겠다. ⓓ 월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주 월요일에 빠르게 처리하고 소견서를 다시 보내 달라.


우선 호혜를 베푼다~는 식의 손해사정사 말투에 화가 났다. 이것은 일종의 기만 행위다. 우선 고객이 가입한 실손의료비보험에서는 급여부분의 90%, 비급여부분의 80%를 보상하게 되어있다.  


그렇다면 과연 비급여부분의 40%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약관을 살펴보면 국민건강보험 미적용 시에는 40%를 보상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국민건강 당연적용제 국가이며 예외 케이스는 드물다. 가능성이 좀 높은 건 자동차 사고와 산재사고. 하지만 고객은 그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과연 전문가인 손해사정사가 이러한 내용을 몰랐을까? 


나는 절대 아니라 판단했다. 손해사정사의 의도가 빤히 보이는 듯 했고, 딱히 옹호해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화가 났다.




비슷한 케이스로 영수증에 병원비가 "비급여"만 찍혀 있다고 "국민건강보험 미적용 항목은 40%만 보상합니다"는 식으로 넘어가려 하는 경우가 있다. 실제로는 "비급여만" 있는 경우에도  "국민건강보험법의 적용을 받는 비급여 항목"이기 때문에 실손의료비 보험의 보상은 약관에 기재된 대로 비급여의 80%가 나오는 게 맞다.


고객을 통해 손해사정사에게 ⓐ 비급여 항목에서 40%가 지급되는 경우에는 국민건강보험 미적용 시에만 해당되며 ⓑ 건강보험미적용대상자와 비급여는 전혀 다르고 금융감독원의 민원사례 및 공문에서 이에 관한 내용이 있다며 링크를 보냈다. (진료비 40% 보상대상 명확화) ⓒ 이러한 사항을 당신들이 몰랐을 리는 없고, 내게는 기만행위로 느껴진다. ⓓ 보상팀과 다시 이야기 한 뒤 회신을 달라. ⓔ 만약 납득 되지 않는 내용이 나오면 금융감독원이나 다른 손해사정사를 통해 추가적으로 확인하겠다. 는 취지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 뒤로 고객이 알려준 손해사정사의 짐짓 진지하고 정중한 태도는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보험사가 손해사정사를 고용해 손해사정을 하는 것 자체가 해당 보상 건이 "안주는 게 맞는" 경우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보험사는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으려 할 유인이 있고 보험사에 고용된 손해사정사도 그럴 유인이 있다. 그것을 수행하지 않는 것은 보험사에 대한 배임행위라 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줘야 할 돈 안 주려고 약관에 기재되지도 않은 내용 들먹이며, 호혜를 베푸는 척 굴다니. 


너무 한 게 아닌가.